해리 포터 관광명소인 런던 킹스크로스
이제는 글로벌 빅 테크 모인 AI 용광로
패러다임 바꾼 AI 기술, 여기서 제작돼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를 읽어본 분은 런던 킹스크로스역을 아실 겁니다. 소설에선 마법 학교 '호그와트'로 통하는 기차역으로 설정됐고, 덕분에 현실의 킹스크로스도 영국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떠올랐습니다.
영화 해리 포터 1편의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 소설, 영화의 흥행 이후 실제 촬영지는 대표 관광 명소화됐다. [이미지출처=해리 포터 영화 스틸]
그러나 킹스크로스는 단순히 인기 소설·영화에 나온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유럽 최고이자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 테크 밀집 지역이며, 특히 인공지능(AI) 관련 최첨단 연구가 이뤄지는 'AI 용광로'라고 할 만합니다. 올해 영국 과학계의 몫으로 돌아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도 이곳에서 일합니다.
구글의 '전자두뇌'는 해리 포터 열차역에
해리 포터 촬영지인 세인트판크라스역(오른쪽)과 실제 킹스크로스역(왼쪽) 사이에 있는 빌딩 밀집 단지에 구글을 비롯한 수많은 빅테크의 AI 연구단지가 몰려 있다. [이미지출처=구글 맵스]
원본보기 아이콘해리 포터의 킹스크로스가 마법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라면, 현실의 킹스크로스는 유럽 교통의 요지입니다. 영국 도시 전역을 이어주는 각종 노선은 물론,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유로스타'의 종착역이기도 하지요. 덕분에 세계 각지의 인재가 모이기엔 최적의 조건이었고, 첨단 산업이 번성했습니다.
킹스크로스역과 세인트판크라스역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엔 10~20층짜리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이곳에 미국 빅테크 '구글'의 영국 지사와 세계 최대 AI 기업 '딥마인드' 본사가 있습니다. 영국 기업등록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구글은 이곳에서 7400명의 직원을 고용했고, 딥마인드 또한 수천명을 고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딥마인드는 자사 연구원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여러 영국 매체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구글 런던 지사와 딥마인드는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AI 기술을 개발합니다. 챗GPT의 대항마인 제미나이는 물론, 유튜브의 영상 데이터 송수신을 관리하는 AI, TPU 등 구글 반도체를 설계하는 AI, 그리고 이번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데미스 허사비스 딥마인드 창업자·존 M. 점퍼 딥마인드 이사가 개발에 참여한 '알파폴드'도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평균 연봉 4.8억…세계 AI 스타 다 모였다
구글이 지금껏 이곳에 투자해 온 금액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일례로, 지난해 구글은 이곳 직원 한 명당 평균 26만6000파운드(약 4억8000만원)의 총연봉(기본급과 스톡옵션 등을 합친 액수)을 지불했습니다. 시니어 개발자나 '스타' AI 연구자의 경우 10억을 훌쩍 넘는 연봉에 영입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합니다.
구글 모기업인 알파벳은 킹스크로스 지사에만 매년 수조원 넘는 금액을 퍼붓습니다. 그 결과, 영미권 최고 명문대 출신 교수들부터 유럽의 석학들까지 모두 킹스크로스에 모여 AI 연구 '드림 팀'을 일궜습니다. 특히 변변찮은 빅 테크가 없는 유럽 대륙 연구자 입장에서 딥마인드는 AI 업계의 호그와트 같은 곳입니다.
킹스크로스가 시작부터 글로벌 빅테크의 전진기지였던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런던의 빈곤층이 거주하던 슬럼 지구였습니다. 하지만 유로스타 열차 개통을 계기로 재개발을 진행했고, 특히 2010년부터 이뤄진 영국의 '테크 호황'이 킹스크로스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과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문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런던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테크 산업에 눈길을 돌렸는데, 10여년에 걸친 정책적 지원과 투자가 이른 결실을 본 셈입니다.
오늘날 킹스크로스와 그 주변 지역은 수많은 테크 기업의 중심지입니다. 구글 거점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메타(옛 페이스북) 영국 지사가 있으며, 이곳에서도 7000여명의 엔지니어를 고용합니다. 테슬라의 라이벌로 꼽히는 자율주행 AI 개발 업체 '웨이브'도 근처에 연구소를 뒀습니다. 또 1500명 넘는 박사급 인력이 일하는 초대형 생명공학 연구 시설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합니다. 딥마인드가 최첨단 AI와 바이오 연구를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지요.
성장이냐 주권이냐…고심 깊어지는 AI 전략
2025년 완공 예정인 킹스크로스 '랜드스크래퍼'. 길이 300m가 넘는 초대형 건물로, 5000여명의 세계 최고 AI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일할 예정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흔히 영국을 AI 산업의 '보이지 않는 챔피언'에 비유하곤 합니다. 작금의 AI 발전에 있어 영국 기업인, 과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구글은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 유명한 AI 기업들은 어김없이 영국에 AI 연구 센터를 두고 있습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영국 기업인 ARM 홀딩스가 AI 작업에 최적화된 CPU를 디자인해 온 덕분에, 엔비디아와 깊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챔피언이란 건, 바꿔 말하면 영국계 '토종' 플레이어가 희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은 오늘날 유럽 최대의 AI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의 초대형 빅 테크들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일각에선 영국이 '거대한 이스라엘'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도 최첨단 기술력을 뽐내지만, 이스라엘의 기업들은 대개 미국 빅 테크의 자회사이거나 미국에만 기술을 조달하는 B2B 업체입니다. 비슷하게 영국의 테크 경제권도 미국에 '속박'되는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만일 미국계 초대형 IT 기업들이 딥마인드 같은 스타트업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알파폴드는 탄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영국은 우수한 기술력과 인재, 그리고 해외 자본에 과감히 문호를 개방하는 전략으로 AI 산업의 중심에 올라탔습니다. 대신 AI의 '주권'을 어떻게 확보할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비영어권 국가라는 특성을 살려 AI 주권을 살리기 더 용이한 환경일 겁니다. 하지만 AI 산업의 핵심 인재와 자본이 더더욱 영미권으로 모이는 작금의 환경에선 AI 주권국들이 본격적인 성장을 구가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성장 전략과 주권 전략, 결국 둘 다 일장일단이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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