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제한된 시간 내에서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게임이다. 제한 시간 내에 착점하지 않으면 경기가 끝날 수도 있다. 지난달 21일 한국 프로기사 박정환 9단은 그렇게 시간승을 거뒀다. 세계 메이저 대회인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에서 벌어진 일이다. 중국의 렌샤오 9단은 초읽기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수를 두지 못하면서 패배했다.
바둑에서 시간패는 의외로 빈번하다. KB국민은행 바둑리그는 체스에서 널리 쓰이는 시간 제한규칙인 ‘피셔 방식’ 도입 이후 시간패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논란의 피셔 방식은 1970년대 세계 체스 챔피언 보비 피셔의 이름을 딴 제도다.
반면 피셔 방식은 빠르게 수를 두는 만큼 자기 활용 시간이 늘어난다. 예를 들어 10분 기본 시간에 피셔 20초인 대국에서 30초가 남았다고 가정해 보자. 30초 남은 시간 중 5초가 지난 후 착점하면 25초가 남는다. 여기에 피셔 20초를 더한 45초가 다음 수의 제한 시간이다. 대국자가 최대한 빠르게 다음 수를 둬 나가면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피셔 방식은 계시원이 하나, 둘 등의 방법으로 입으로 초읽기를 하는 게 아니라 대국자 본인이 직접 시계 버튼을 누른다. 대국에 집중하다 뒤늦게 버튼을 누를 수도 있고, 기계를 다루는 과정에서 오류 위험도 있다.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서 시간패가 많이 나온 배경 중 하나다.
시간패 논란과 무관하게 젊은 기사를 중심으로 피셔 방식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다. 피셔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대국 시간을 예측할 수 있고, 빠른 대국 전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TV 중계를 하는 미디어가 흡족해할 변화다. 바둑은 그동안 미디어 친화적인 방향으로 제도를 바꿨다. 피셔 방식 도입도 넓게 본다면 그런 취지다.
대중화에는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인데, 바둑 본연의 매력을 흔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한 수의 착점을 위해 몇 시간을 생각하던 과거 바둑을 지루함이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기다림의 시간에 대국자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바둑의 길을 설계한다. 그 생각의 과정은 기보(棋譜)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바둑의 또 다른 세계다. 바둑에 관한 본질적인 의미를 되새긴다면 제도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서둘러 착점하도록 유도하는 게 옳은 변화의 방향처럼 인식되지만, 바둑 철학이 설 자리는 그만큼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둑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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