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려경 순천향대 부속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KBM 여자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일·훈련 병행 힘들어 많이 울기도
앞으로도 신생아 의사 남고 싶어
"좋아하는 일엔 과감히 뛰어들길"
"복싱을 하는 마음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 진심이에요. 운동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죠."
프로의 세계는 야생과도 같다. 선수들의 남다른 재능과 훈련으로 쌓아온 시간을 단번에 뛰어넘기란 쉽지 않다. 직장인이 늦깎이 입문한 운동으로 프로 데뷔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꿈같은 이야기다.
지난달 26일, 병원 당직 근무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다시 출근한 서려경 교수를 만났다. 의사 일과 프로 훈련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연습을 거듭하다 보면 온몸이 금강불괴가 돼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며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이야 편하게 웃을 수 있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없이 권투 글러브를 갈고, '의사가 무슨 복싱이냐'라는 편견과도 싸우고, 병원 업무와 훈련을 병행하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서 교수는 "세계 챔피언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광복절에 한일전을 했다. 무승부로 끝났는데 소감은.
-의사가 프로 복서라는 것 자체가 큰 화제가 됐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가.
△술친구로 지냈던 친한 선배 의사가 권유했다. 본인이 다니는 체육관이 있는데 와 보지 않겠냐고 해서 2018년 말 시작했다. 우리 체육관이 요즘 하는 다이어트 복싱 이런 거 하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클래식한 체육관이라, 혼자 갔으면 쑥스러웠을 것 같긴 하다. 그분 아니었으면 못 갔을 것이다.
직장인 누구나 일하면서 다 스트레스받지 않나. 이를 분출하고 싶던 타이밍이었다. 원래 달리기도 잘하고 운동 신경도 있는 편이었는데, 딱 맞아떨어져 '이 운동이다' 싶었다. 2020년 프로 테스트를 보고 같은 해 11월 14일에 프로로 데뷔했다. 체육관에 첫발을 들인 이후 지금까지 구력은 만으로 5년이다.
-본인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파워다. 경기하면 상대 선수는 맞아서 피도 많이 나는데 나는 피가 잘 안 난다. 대신 주먹에 멍이 든다. 힘이 좋으니 정교한 스킬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복싱하는 의사'는 전무후무한 별명인데 감내해야 할 것도 많았을 것 같다.
△그렇다. 지금은 알아보시는 분들도 많지만, 예전에는 직업이 의사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편견을 갖는 사람이 많았다. 프로 생활 초반에는 '무슨 복싱 한다고 돌아다니냐'며 병원 안에서도 이를 안 좋게 보는 분들도 있었고. 복싱할 때는 반대로 의사라는 이유로 실력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상했다. 나는 프로 복싱 선수고 웬만한 선수보다 운동을 많이 하는데. 경기 하나만 해도 '의사가 이 정도면 잘한다'라고 하거나 어쩌다 실수하면 '의사니까 못 하지'라는 평가들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을 것 같다. 일과가 어떻게 되나.
△병원 당직 근무 끝나면 체육관으로 간다. 줄넘기하고 몸 풀고 섀도복싱하고 샌드백 치고 관장님이 미트 대주면 열심히 친다. 프로라고 훈련이 특별한 거는 없고, 기본기에 집중한다. 기본기 훈련이어도 일반인과 선수가 낼 수 있는 출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집에 가서 잔다. 집에 가면 손가락이 아파서 리모컨도 잡기 싫어진다. 병원에 출근 안 하고 쉬는 날에는 오전에 러닝을 추가한다. 마이크 타이슨은 이런 러닝과 복싱 훈련을 하루 세 번 반복했다고 하니, 내가 하는 정도면 사실 극한의 훈련은 아니다.
-겸손하게 말하지만 뒤에는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 이 정도까지 해봤다는 것이 있다면.
△연습하다 보면 복싱 글러브는 1년에 3~4개씩은 기본으로 바꾸는 것 같다. 안에 솜이 찢어지고 터지기 때문에.
-스포츠는 정신력 싸움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멘탈이 굉장히 단단한 것 같다.
△지난 3월 세계챔피언전 무승부를 극복하고 나니 덤덤해진 거다. 경기 이후 잠깐 슬럼프가 찾아왔었다. 나 자신도 심리적 부담을 많이 느꼈는데, 바깥에서는 그 한 경기 무승부로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려는 것 같았다. “그것 봐라. 진짜 잘하는 애 만나니까 못 하지. 지금까지 한 것은 만들어진 경력일 것이다”라는 비난을 받으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상처를 받더라. 운동 시작 이후로 운동을 4일 이상 쉰 적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2주간을 쉬었다. 집 밖에 못 나가겠더라. 사람도 만나기가 싫고.
-본인이 느낀 심리적 부담이란 어떤 것이었나.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는데 나에겐 사실상 큰 패배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 이긴 경기인 줄 알았다. 항상 이기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진정한 패배를 맛본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할 때 말 그대로 자신을 갈아 넣는다. 그리고 여태 모든 결과는 이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독하게 공부하고 1등 해서 의대 간 것도 그렇고. 그런데 그게 꺾인 느낌이었다. 노력을 정말 해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이것이 힘들었다.
-지금은 한일전도 그렇고 경기 결과에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한고비를 넘기고 나니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매 순간 잘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였고. 사실 요즘 e스포츠를 보면서도 마음을 다잡는다. 구단 T1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들을 보면서 마인드 컨트롤하는 법과 스포츠를 대하는 방법을 배운다. 간혹 성적이 부진해 'T1의 영광도 끝나간다'라는 우려가 나와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승으로 증명한다. 스포츠 세계에서 선수는 항상 잘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도 많고. T1을 보면서 '못하는 경기도 있지', '다음에 더 좋은 모습 보여주면 되지'하는 것들을 배운다.
-그것 말고도 인생의 다른 역경은 없었나.
△2022년 천안에서 서울로 파견 근무했던 시절이 인생의 최대 고비였다. 정말 병원에서 도망나올 뻔했다. 아는 체육관에 가긴 했는데 원래 봐주던 관장님도 안 계시고, 기량은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도 있고 일도 힘들었다. 일도 운동도 놓을 수 없으니 퇴근해서 운동하고 밥 먹고 자고 다시 출근하고 일하는 삶을 반복했다. 일과 운동 병행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인생에서 흘릴 눈물은 그때 다 흘렸던 것 같다.
-그런데도 당시 복귀전은 1년 만에 치렀다.
△극복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운동을 제대로 못 하다 보니 살도 올라 있었고. 복귀전을 위해 짧은 시간에 몸부터 시작해 모든 패턴을 바꿔야 했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인 도전은 무엇인가? 복서 서려경, 그리고 의사 서려경으로서.
△의사 서려경으로서는 지금처럼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다 보니 상황이 좋지 않은 아기들을 많이 본다. 이런 작은 생명을 돌보고 건강히 퇴원시키는 데 보람을 느낀다. 사실 요즘 소아과 지원하는 의사들도 줄어들어 아기들이 갈 병원이 없다. 계속 신생아 의사로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복서 서려경은 세계 챔피언이 될 때까지 계속 실력을 키워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계 챔피언 도전은 계속된다는 뜻인가.
△다시 도전한다. 토너먼트에서 맞붙을 상대 선수를 찾고 경기 날짜를 정하는 것이라 아직 대략적인 일정도 안 나온 상태다. 경기가 잡히면 링에 오른다.
-서 선수처럼 자신만의 도전을 이어나가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자기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겠다고 하는 것에는 몰두하기를 바란다. 힘들겠지만 결국 꾸준함이 중요하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그 이후의 과정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그러니 좋아하는 일에는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과감히 뛰어들면 좋겠다.
서려경 교수는,
1991년생으로 순천향대학교 부속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이자 한국복싱커미션(KBM)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이다. 2019년부터 복싱을 시작해 2020년 프로 복서로 데뷔, 줄곧 의사와 복싱 선수를 병행해왔다. 2023년 7월 프로 데뷔 3년 만에 현직의사 신분으로 한국복싱커미션 여자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으로 등극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현재 공식 전적 매체 '복스렉' 세계랭킹 13위다.꼭 봐야할 주요뉴스
"전쟁 난 줄 알았다"…반값 사재기에 대형마트 '초...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lboqhen.shop)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