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건 제작자의 세계관이다. 영화에서는 악당의 자아 같은 게 잘 그려지지 않기 마련이지만, 현실 세계에서 사건이나 관계 속에서 소비되는 타인들에게도 자아가 있고 자신의 오랜 삶이 있다. 그 자아의 절대적 한순간에 누구에게든 기억되고 싶은 바람이란 당연해 보인다. 영화에서 "기억해줘"와 "기억할게"로 끝나는 관계는 무수하지만 대개 주목받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것이란 사실을 나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지금이라는 고비를 넘기는 데 얼마간 힘이 될 것이다.
영화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를 쏜 계부 비달 대위가 "내 아들에게 내가 죽은 날을 알려주라"고 유언하지만, 그를 응징한 동네 사람들은 "네 아이는 네 이름조차 모르고 자랄 것이다"라고 말한다. 삶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무의미할 수 있지만, 아들의 기림 속에서 연속된 삶을 살고 싶었던 기대라면 달라진다.
사람들의 말은 그마저 밟아버리는 형벌이었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형벌이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누군가에 의해 나는 기억될 것이고 기려질 것이라는 기대는 마지막 이후에도 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고, 그 마지막을 견디는 위안 정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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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난 줄 알았다"…반값 사재기에 대형마트 '초...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lboqhen.shop)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