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울진 안일왕산 정상에서 ‘대왕소나무’를 마주했다. 수령이 600년가량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직경 1m·둘레 5m·높이 14m의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특히 이 나무가 뿌리 내린 곳은 절벽의 가장자리로, 대왕소나무는 절벽 아래 옹기종기 모인 금강송을 위에서 아래로 훤히 내려다보는 듯했다. 흡사 군주(왕)가 높은 곳에서 신하들을 대하는 모양새다. 대왕소나무라는 이름도 나무의 웅장함과 이 같은 분위기를 담아내기 위해 붙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난 8월을 즈음해서부터는 제4구간 통행이 제한돼 일반인의 탐방이 통제되고 있다. 대왕소나무를 보호·관리하는 소수 인원만 이곳을 찾고 있다. 통행 제한은 대왕소나무의 수세가 약해지면서 외부인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다.
이 무렵 대왕소나무는 소나무좀 등 병해충이 침입해 수세가 급격히 약해졌다. 산림청은 대왕소나무를 되살리기 위해 제4구간 통행을 제한하는 것과 동시에 긴급방제와 주변 고사목 제거, 양분공급 등 보호조치를 진행했지만 지금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현장을 찾은 산림 전문가들이 대왕소나무를 되살리기 쉽지 않다는 판단을 내놓는 배경이다.
복수의 현장 관계자는 대왕소나무의 수세가 급격하게 나빠진 데 기후변화의 영향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여름철 고온 일수가 예년보다 늘고, 벼랑에서 햇볕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상황이 대왕소나무에게는 악조건이 됐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올해는 비까지 적어 수분 스트레스도 컸다. 결국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체력이 약해진 틈을 타 병해충이 침입하면서 수세가 더욱 약화됐을 것이라는 게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국립소광리산림생태관리센터에 근무하는 천동수(55) 주무관은 “더위를 피해 휴식할 수 있는 사람도 견디기 힘든데, 뙤약볕을 피하지 못하는 나무는 오죽했을까 싶다”며 “대왕소나무에는 한낮 온도가 35도를 넘나드는 날이 잦았던 올여름이 특히나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현장을 찾은 전문가 다수는 대왕소나무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수세가 나빠진 상황에서 병해충 피해를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며 “연일 계속되는 불볕더위에 수분 스트레스가 더해져 상태가 악화된 것”이라고 주변 분위기를 전했다.
대왕소나무의 소식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모여 있는 소광리 주민들의 상실감도 커져만 간다. 소광리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줄곧 마을을 지켜왔다는 최수목(65) 씨는 “누구에게는 보통의 나무일 수 있는 대왕소나무가 소광리 주민들에게는 남다른 애정의 대상”이라며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까닭에 대왕소나무에 얽힌 추억이 여전히 남아 최근의 상황이 어색하고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고 운을 뗐다.
최 씨는 1970년대 초 100여명의 소광리 주민이 해마다 돌아가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시절을 회상했다. 마을과는 제법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부터 대왕소나무는 마을의 영물(靈物)처럼 여겨져 왔다. 비록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주민 수가 급격히 줄고, 같은 이유로 제사를 지내던 마을 전통도 어느새 사라졌지만 당시의 기억만큼은 또렷이 남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적 어른들과 함께 찾아갔던 대왕소나무, 당시 마을에선 이 나무를 ‘어른 나무’라고 불렀다”며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대왕소나무가 내 생전에 고사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고사해 가는 대왕소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이유”라고 고개를 떨궜다.
울진 소광리는 조선시대부터 일반인의 벌채와 입산이 금지된 ‘황장봉산’으로 지정돼 보호·관리돼 왔다. 산림청은 2014년 대왕소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 별도 보호·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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