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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in전쟁사]백년인생 정리한 '냉전의 파괴자', 키신저가 바꾼 세계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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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소용돌이에 美 이민
'메테르니히' 꿈꾸던 현실주의자
말년에 친러·친중 발언은 논란

[뉴스in전쟁사]백년인생 정리한 '냉전의 파괴자', 키신저가 바꾼 세계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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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탈냉전 국제질서를 만든 국제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신냉전 구도가 본격화되고,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동시 전쟁이 펼쳐지는 현재 상황에서 그의 죽음은 한시대의 종말로 받아들여지면서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특히 자유진영 동맹들과의 이른바 가치외교를 중시하던 현재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적 실패가 지적을 받으면서 키신저 전 장관이 주창했던 현실주의 외교는 다시금 힘을 받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국제사회에서 아예 배제하려던 지나친 외교적 압박이 결국 각지의 국지전으로 표출됐다는 비판 때문인데요.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

일각에서는 오히려 키신저의 지나친 현실주의 외교와 세력균형 노력이 중국과 러시아의 힘을 지나치게 키워줬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이던 메테르니히의 실리 외교노선을 추구해 세계의 안정과 평화 구축에 노력했다고 하지만, 역으로 일부 전쟁들은 그의 손에서 더 피해가 커졌다는 주장들도 나오면서 평가가 많이 엇갈리고 있죠.
이번시간에는 이처럼 100년 인생 전체동안 전세계 외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키신저의 행보와 그를 거쳐갔던 현대 전쟁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뉴스(News) : 탈냉전 새시대를 열었던 키신저, 100년 인생 마감
지난 7월 중국을 방문해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만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의 모습.[이미지출처=AFP·연합] 지난 7월 중국을 방문해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만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의 모습.[이미지출처=AFP·연합] 원본보기 아이콘

우선 뉴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키신저 전 장관은 이날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냉전시기 가장 극적인 순간 미국의 국무장관으로서 세계 역사를 뒤바꿨던 그는 100세 인생을 마감한 것인데요.
그는 올해도 매우 열정적인 한해를 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올해 세계를 강타한 트렌드였던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이 앞으로 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고, 지난 7월에는 미중 관계가 냉각된 상황에서 직접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죠.
미국의 가치와 배치된 독재정권, 권위주의 정권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늘 미국의 국익과 맞는다면 어느 누구와도 회담을 갖고 외교를 추진했던 그의 현실주의 외교정책에 대한 평가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일명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라 불리는 그의 현실주의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립다는 평가를, 또다른 일각에서는 오늘날 국제공조 붕괴의 원인이라며 비판하고 있죠.
◆역사(History)1 : 그의 인생을 바꾼 2차대전…'20세기의 메테르니히' 꿈꿔
1814년 9월,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력균형과 안정을 통해 또다른 대규모 전쟁을 피하고자 열렸던 '빈 회의(The Congress of Vienna)'의 모습을 그린 그림 1814년 9월,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력균형과 안정을 통해 또다른 대규모 전쟁을 피하고자 열렸던 '빈 회의(The Congress of Vienna)'의 모습을 그린 그림 원본보기 아이콘

이처럼 현대사의 큰 족적을 남긴 키신저의 유년시절은 암울한 전쟁으로 시작됐습니다. 1923년,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중간인 전간기 독일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때부터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를 바로 맞게 되는데요.
그가 10세 때인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고 이어 1938년, 독일 내 모든 유대인에 추방령을 내리면서 키신저의 운명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다행히 그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독일 내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아예 미국 뉴욕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됐고, 이 덕분에 목숨은 건지게 됐죠.
그의 집안이 미국 이주를 결심하게 된 것은 나치의 집권 이후 유대인들이 당한 각종 폭력과 테러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 전해집니다. 키신저와 그의 유대인 친구들도 나치 청소년 단원들에게 자주 폭력을 당했다고 하죠.
이후 나치의 폭력을 피해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그는 주경야독을 하며 공부에 힘썼다고 합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면도기 공장에서 일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1943년 미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으면서 시민권을 취득하게 됐고, 2차대전에도 직접 참전하게 됐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됐다고 하죠. 1954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얻은 그는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그는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의 핵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통해 세력균형과 평화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요.
특히 그가 주목했던 역사적 인물은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이른바 '백년평화'를 구축한 외교관으로 알려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후작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는 흔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정복고, 반동주의를 내세웠던 시대착오적 인물이란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외교사에서는 각국간 세력 조정과 견제를 통해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대전이 유럽에서 재발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있죠.
메테르니히는 당시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침략 전쟁의 원흉으로 지목된 프랑스를 분할해 다시는 힘을 쓰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다른 동맹국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전후 지나치게 힘이 강력해진 러시아의 견제를 목표로 프랑스가 온전히 국토를 보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일명 "회의는 춤춘다"는 말을 남긴 당시 '빈 회의(The Congress of Vienna)'의 주요한 의제였죠. 이러한 그의 실리주의 외교방식은 키신저의 외교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하죠.
◆역사(History)2 : 오로지 '국익'에 입각한 전쟁과 외교…중·러 키워줬다는 비판도
1975년 2월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제럴드 포드(가운데) 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악수하는 모습.[이미지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1975년 2월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제럴드 포드(가운데) 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악수하는 모습.[이미지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원본보기 아이콘

그러한 현실주의 실리외교를 바탕으로 키신저는 3차 세계대전 우려가 팽배해있던 냉전 초반부터 중국과의 데탕트, 탈냉전 시기까지 기나긴 기간동안 국제 외교를 조율해나갑니다. 2차대전 이후 벌어졌던 베트남 전쟁이나 중동전쟁,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내전 등 전세계 전쟁과 분쟁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고, 전세계 크고 작은 나라들의 운명도 결정짓게 됐었죠.
특히 그의 이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은 단연 베트남 전쟁입니다. 1969년 당시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됐던 키신저는 당시 미국이 매우 발빼기 어려웠던 난제인 베트남전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상까지 이끌어냈는데요.
1969년 당시에는 이미 베트남 전쟁 자체가 북베트남의 전략적 우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미국은 이미 승리를 거두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패배를 인정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전쟁 장기화에 따라 막대한 예산만 소모되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완전히 백기를 들 때까지 게릴라전으로 괴롭힐 생각이라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키신저는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으로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합니다. 이 미치광이 전략은 미국정부가 소련에 핵전쟁을 벌이겠다는 허세와 협박을 통해 소련이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나오게 유도하는 전략이었죠. 이 전략은 주효했고, 결국 베트남전 종전과 평화협상 체결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훗날 이 미치광이 전략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다시 외교적으로 활용됐죠.
이후 그는 주로 소련, 중국과의 데탕트에 힘쓰며 삼국간 세력균형과 평화모드에 힘을 썼고 1979년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그는 올해 7월까지 일생동안 무려 중국을 100번이나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중국의 관계 회복에 힘썼죠.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그가 오늘날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 원흉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키신저는 배후에선 오히려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싹을 미리 잘라내기 위해 각국 내전에 개입하는 모습도 보여줬는데요. 1970년대 칠레,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친미 군부 쿠데타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지원 등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표면상 화친과 별개로 세력 확장을 못하도록 사전에 길을 끊어버리는 그의 현실주의 외교정책 속에 여러 나라의 운명이 엇갈리게 됐죠.
한반도의 현재 분단 구도에도 그는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그는 유엔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승인하는 이른바 '교차승인' 구상과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해 세력균형을 이뤄야한다고 주장했죠.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면서 그의 구상 중 일부는 실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시사점(Implication) : 무너진 '백년평화'의 꿈…설 자리 잃는 실리외교
[이미지출처=AFP연합뉴스] [이미지출처=AFP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

이처럼 오늘날 세계질서 곳곳에 큰 영향을 끼쳤던 그가 떠나고, 세계 질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치달으면서 기존의 국제외교가 설 힘이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교전처럼 외교보다 전쟁, 군사적 위협이 더 통용되는 시대로의 변화가 눈에 띄기 때문인데요.
181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까지 이른바 백년평화를 이끌었던 메테르니히처럼 냉전시기 3차 세계대전을 막고자 노력했던 키신저의 노력도 빛이 바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가 다시 반복돼 3차 세계대전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전세계가 파멸할 것이란 공포심도 커지고 있는데요. 국제사회에서 키신저가 주창했던 균형과 견제, 평화를 위한 노력이 지속돼 새로운 세계대전의 발발만은 막기를 바라봅니다.




이현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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