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아이폰 출시 2년전 잡스에 스마트폰 제작 의뢰
잡스, "미쳤다"면서 손에 일본 독점 판매권 줘
손 회장 "잡스와 대화 후 10년간 ARM 지켜봐"
손 회장과 애플은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관계다. 애플이 가는 길의 길목에 손 회장이 서 있었다. 첫 선택은 대성공이었지만 이후 선택은 부침이 심하다. 아이폰은 물론 아이폰의 영혼을 원했던 손 회장의 꿈을 따라가 보자.
그의 투자 사업은 부침이 컸다. 알리바바, 쿠팡, 슈퍼셀, 샨다와 같은 대박도 있었지만, 위워크와 같은 실패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런면에서 통신 사업은 무모한 도전 처럼 보였다.
손 회장은 2001년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에 이어 2006년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만년 하위권인 영국 통신사 보다폰의 자회사를 사들였다. 전 세계 어디서든 하위권 이동통신사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물론 지금도 소프트뱅크의 일본 시장 점유율은 20% 정도로 업계 3위다. 그러나 소프트뱅크의 이동통신 업계 순위는 의미가 없다. 소프트뱅크는 2020년 초, 도요타를 제치고 일본 내 시가총액에서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혁신의 상징이다.
손 회장은 어떻게 아이폰의 유통권을 확보했을까. 손 회장은 2014년, 미 언론인 찰리 로즈와의 대화에서 아이폰의 등장에 관한 깜짝 놀랄 과거를 털어놓았다.
손 회장은 보다폰을 인수하기 1년 전인 2005년, 잡스를 만났다. 아이폰 출시 2년전이다. 그는 잡스도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한다. 손 회장은 당시 세계 최대 휴대전화 업체인 노키아에서 부족함을 느꼈다. 대안이 필요했다. 손 회장은 통신 사업을 위한 최고의 단말기를 만들어 줄 사람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 뿐이라고 생각했다.
잡스였다. 아이팟으로 MP3플레이어 시장을 장악한 애플이 전화기를 제작할 적임자로 판단한 것이다.
손 회장을 잡스를 기술과 예술을 접목할 수 있는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규정한다. 머뭇거림은 손 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즉시 잡스에게 전화를 걸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잡스와 만나는 날, 손 회장의 손에는 아이팟을 전화기로 수정한 디자인 시안이 둘려 있었다.
손 회장이 디자인 시안을 잡스에게 내밀었다. 손 회장이 훗날 인터뷰에서 두꺼비 같이 생겼다고 설명한 시안이다.
잡스는 이미 아이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잡스가 손 회장이 내민 디자인을 봤어도 맘에 들어 했을 리는 없다. 미니멀한 디자인에 집착하는 잡스가 손 회장이 들고 온 배 나온 두꺼비 모양의 디자인을 맘에 들어 했을 일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손 회장이 여기서 멈출 리 없다.
"그럼 서류에 사인합시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동통신사도 없으면서 아이폰을 달라고 하는 손 회장이나, 비장의 무기 아이폰을 주겠다고 약속한 잡스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이 됐다. 2006년, 손 회장은 약 20조원을 투자해 보다폰을 인수, 소프트뱅크 모바일을 출범시켰다. 잡스는 2007년 아이폰을 공개했다. 그리고 2008년 소프트뱅크와 애플은 아이폰 공급 계약을 맺었다. 아이폰 두번째 모델인 아이폰3G는 2008년 11월, 일본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아이폰은 일본 시장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만 판매하는 일본 기업들의 전화기가 장악했던 시장에 균열이 생겼다. 아이폰은 일본 스마트폰 시장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손, 아이폰을 보며 ARM을 꿈꾸다
손 회장의 질주가 여기서 끝났을 리 없다. 이번에는 미국 통신 시장까지 노린다. 소프트뱅크는 2013년 미국 3위 통신사인 스프린트를 216억달러에 인수했다. 일본에서는 NTT도코모, 미국에는 버라이즌이라는 이동통신 시장의 절대 강자가 있지만, 손 회장은 주저하지 않았다.
소프트뱅크의 미국 통신 시장 진출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제 소프트뱅크는 스프린트를 통해 미국에서도 아이폰을 유통하게 됐다. 손 회장은 스프린트를 T모바일과 합병하며 미국 이동통신 시장 장악에 나섰다.
손 회장은 이후 미국 통신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면서 또다른 꿈을 꾼다.
잡스와 만난 후 손 회장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였다. 반도체다. 통신사를 인수했지만 10년이나 반도체를 지켜봤다. 기술변화의 흐름을 꿰뚫어 보던 그는 전 세계 모든 스마트폰이 사용하는 반도체를 좌지우지하는 칩을 원했다. 컴퓨터용 CPU가 아닌 모바일을 위한 저전력 칩이다. 목표는 하나였다. 영국 ARM이다.
손 회장은 잡스와 만난 후 배터리 소모가 많은 인텔의 칩을 잡스가 사용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대안은 ARM뿐이었다고 판단했다. 마침 구글도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용 칩의 설계기반을 ARM으로 정했다.
판단은 섰지만, 실행이 어려웠다. 소프트뱅크 모바일 인수 자금을 다 갚은 후에는 미국 통신 시장 진출을 시도했다. 투자 여력이 없었다. ARM은 여전히 잠재적 투자 대상에 머물렀다.
잡스와 만난 후 10년 후인 2016년. 결단의 시기가 다가왔다. 손 회장이 잡스와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에 비해 ARM의 몸값은 10배나 치솟아 있었다. 일찌감치 ARM에 투자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이 가장 싸다는 생각에서 거래 주가에 40%나 되는 프리미엄을 얹었다. 400억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다.
손 회장의 야심은 컸다. ARM의 설계는 모바일 기기들의 심장인 SoC의 근원이다. 사실상 모든 스마트폰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겠다는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아이폰을 개발하지는 못했지만 돈의 힘으로 그 근원을 손에 쥐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손 회장은 ARM 투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ARM은 엔비디아로의 매각 실패 후 최근 미국 증시 상장을 통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만 투자 규모에 비해 손 회장이 확보한 성과는 아직 적다. 손 회장은 무엇을 놓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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