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폴란드에 처음 갔을 때 막연한 의무감에 휩싸여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 박물관을 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최대 규모의 수용소다. 이 절멸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용자 140만 명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수용소를 요새처럼 만드는 높은 벽, 철조망, 가스실, 소각장 등은 육신의 절멸을 자행한 거대한 폭력의 현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가 죽음을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년 만에 제주도를 방문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다급한 의무감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까지 십여 차례 제주도를 다녀왔지만 4.3 평화공원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와 단편 소설 ‘흰 꽃’의 배경이 되는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4.3사건 진상보고서는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4.3평화공원에는 희생자의 이름 없이 나이로만 기록되어 있는 추모비가 곳곳에 눈에 띈다. OOO의 자 1세, OOO의 여 3세… 제주의 마을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들이 많다. 한 집 건너 초상집이었던 당시 가족이 실종된 집은 모두 같은 날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도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역사교훈여행(다크 투어리즘)이 활성화되고 있다. 제주공항에서 만났던 단체 관광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나처럼 첫 방문처럼 보였다. 4.3사건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과’ 영화 ‘지슬’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현장에서 다시 생각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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