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깊이 연구하기 위해 지질학자가 가장 작은 조각인 박편을 준비해 탐구를 시작하는 것처럼, 이번 전시 제목은 여러 개의 지층으로 쌓인 삶의 연대에서 인식되는 하나의 풍경의 가장 작은 조각을 관찰하며 시작되는 작가의 작업 방식을 의미한다.
작품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드(grid)에 대해 작가는 '20세기의 것이었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드는 작가가 거주하고 활동하는 뉴욕, 런던 등의 대도시를 이루는 거대한 지도이자 몇 세기를 거쳐 움직이지 않는 공간과 그 위에 올려지고 철거되는 건축물들이 쌓은 시간을 통합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가 그려낸 블록들은 눈에 보이는 작은 크기로 콜라주 되어있지만, 마치 거대한 건축물을 현미경으로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세포만큼 작은 물질 하나하나를 면밀히 관찰하며 분석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창작자만의 설계도와 같이,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한 인식의 간극을 표현한다. 아울러 공간에 지배당하는 시간, 시간에 지배당하는 공간에 대한 탐구를 작은 조각 하나를 찍어내며 이어 붙이는 행위는 '무쓸모'의 예술의 무한을 보여준다.
이자운은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지만 동경했던 순수 예술에 대해 깊이 탐구하기 위해 뉴욕 알프레드 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하여 우등 졸업했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뉴욕, 런던, 서울을 오가며 다양한 전시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진행한 퍼포먼스 전시의 일부였던 이자운의 인터뷰가 유일하게 기사에 실리면서 주목받았다.
네이랜드 블레이크(Nayland Blake)의 'Got an Art Problem?(예술 문제가 있습니까?)'이라는 퍼포먼스는 휘트니 뮤지엄 3층에서 예술가, 뮤지엄 직원,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 화제가 됐다.
작가는 과거 학교 수학여행으로 우연히 방문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이불, 루이즈 부르주아 등의 설치 작품에 감명받아 ‘이런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예술 거장들이 특별하고 솔직하게 표현한 작품들에 그는 깊은 공감을 표했다. 이후 한국에서 많은 응원을 받지 못한 순수예술 대신 상업 마케팅에 필요한 시각 디자인을 공부했던 선택지에서 다시 돌아와 인지하고 사유하는 예술 철학에 전념한다.
▲김수연 개인전 'Catcher(수집자)' = 전시복합공간 챕터투는 김수연 개인전 'Catcher(수집자)'를 진행한다. 날씨로 표상되는 시간을 물질로 치환시킨 ‘날씨 시리즈’를 선보여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사계절 온도와 습도를 캔버스에 담았다.
10여년간 작가는 식물도감, 백과사전, 춘화집 등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입체물로 제작해 정물화 형식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후 날씨 연작을 포함해 존재했으나 사라진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어떻게’ 그릴 것인지 주안점을 둔 실험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0월까지 약 1년간, 보이지 않는 날씨 요소로 사계절을 기록한 작가는 물감의 보조제 역할을 하는 아크릴 미디엄 물질을 단독으로 사용해 온도, 습도에 따라 비의도적 방식으로 흔적을 만들었다. 실내, 실외의 온도, 습도가 급격한 차이를 보이는 늦가을부터 특히 한파, 한여름 폭염 기간에는 물질의 표면에 드라마틱한 균열이 생겨 마치 상처와 같은 흔적이 생겼다.
그날 인상 깊었던 하늘의 색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해 가장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잘라내 하늘의 색을 미디엄과 섞어 캔버스 8호 크기에 340~380ml 양을 미디엄에 부으며 작업을 진행했다는 작가는, 그 시각의 실내외 온도, 습도는 미디엄에 들어간 아크릴 물감 색이름과 양을 함께 기록해 저장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저장한 작업에는 어떤 하루도 똑같이 기록된 흔적, 모양이 없었다.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날짜와 시간은 매일의 다른 차이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든 인위적 개념으로 하루에도 다른 역사가 존재했다.
작가는 “문득 쌓인 실패된 바탕체 그림들을 바라보다 실패라고 규정한 흔적 자체가 비의도적인 방식으로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그림 그리기 이전에 실패된 그림들이지만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날씨의 요소(온도, 습도)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이러한 이미지들 자체에 주목하여 시리즈로 기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날짜와 시간이란 인공적 개념에 익숙해져 매일을 별다른 것 없는 하루로 여기는 관객에게 어제와 오늘이 다른 날임을 일깨우는 한편, 매일 같이 다른 흔적은 우리 역시 매일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는 11월 23일까지, 서울 마포구 동교로 27길 전시복합공간 챕터투.
▲진영 개인전 '사이' = 미술품 경매회사 케이옥션의 자회사 아르떼케이는 진영의 개인전 '사이'를 선보인다. 작가와 처음 호흡을 맞추는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신작 23점과 구작 13점을 공개한다. 특별히 전시 기간 중 작가 작품 속 앵무새 인간을 형상화한 인형을 굿즈로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시리즈로 구분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더해지며 이 시리즈는 점차 완성됐는데, 2011년부터 앵무새 머리를 한 사람들이 다양한 형상으로 군집한 모습을 화면에 담기 시작한 작가는 2014년 아이가 탄생한 기쁨을 ‘넝쿨째 굴러온 호박’에 비유하며 호박 시리즈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며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던 공원에서의 일상을 바탕으로 2020년 본격적으로 공원 시리즈를 시작했다. 한 사람과 만날 때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온다는 말처럼 진영의 작업 역시 한 점의 작품마다 스며든 지난 시절과 흘러가는 오늘, 그리고 다가올 시간을 함께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작품을 마주하는 이들 각자의 삶과 만나며 또 하나의 고유한 이야기를 창조한다.
하지만 나의 세계에서 타인의 세계로 향하는 이들의 갈망이 이번 연작에서 처음 표출된 것은 아니다. 과거 시리즈에서 앵무새 사람들은 언제나 희망의 풍선을 띄우고 연을 날리며 주어진 프레임 안팎으로 연결됨을 꿈꿔 왔다는 점에서, 작가가 건축하는 세계와 이야기는 무한한 확장을 기대하게 한다.
아르떼케이 관계자는 "이번 진영의 개인전 '사이'를 통해 관람자가 다채로운 빛깔과 일상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우리 발걸음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떨림과 울림이 있는 멜로디에 귀 기울여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는 11월 6일까지, 서울 강남구 언주로 아르떼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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