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 의혹 속에 의구심 커진 여론조사
참고 수단 넘어 의사 결정 지위 차지
감시 강화하고 역할 줄여야
여론조사는 흔히 여론의 바로미터(barometer, 기압계)라고 불린다. 고기압일 때는 날씨가 맑고, 저기압일 때는 날씨가 흐려지는 양상을 보여 기압 자체가 일종의 날씨의 척도가 되었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쓰이게 된 말이다. 하지만 고기압이라고 해서 항상 맑은 것도, 저기압이라고 해서 항상 흐린 것도 아니다. 여론조사 또한 대중의 여론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한 방법에 불과한데 어느 순간부터 여론조사는 ‘참고 자료’를 넘어 ‘의사 결정’ 수단이 됐다. 여론조사 전문가를 자처한 명태균씨가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여론조사는 문항 설계나 조사 방식, 조사의뢰자나 조사기관에 대해 정치적 선입견을 갖는 하우스 효과(house effect) 등 여러 이유로 편향과 오류의 위험이 있다. 미국 대선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만 이를 밝히지 않는 ‘샤이 트럼프’ 문제를 두고서 선거 때마다 표심을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도 10·16 부산 금정구청장 보궐선거와 관련해 '박빙'이라는 여론조사를 받아봤지만. 선거 결과는 여당 후보가 22.1%포인트 압승으로 끝났다. 이처럼 여론조사는 실제 여론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 더욱이 최근 명씨 관련 조작 논란을 겪으며 여론조사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문제는 여론조사가 우리 정치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양극화 속에 정치 관련 대화는 가족 간에도 금기시되면서 여론조사는 다른 사람의 정치 성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 역할을 한다. 자연히 ‘여론조사에서 앞서간다’, ‘상승세를 보인다’는 내용만으로 여론 자체가 만들어지게 됐다.
더 나아가 정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인 공직 후보 추천 과정에서 여론조사는 당락을 좌우하고 있다. 지난 총선의 경우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현역의원 컷오프부터 실제 경선까지 여론조사를 선택의 기로마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계파별로 나눠 먹던 공천 방식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취지였지만 확률적 통계의 모호성과 조작 위험성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통계학상 오차범위 내 격차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하지만 공천에서 이 숫자는 당락을 결정한다. 더욱이 정당 여론조사의 경우 공표용 여론조사와 달리 사전 신고 의무가 없어 마땅한 감시 수단도 없다. 이 때문에 후보자들은 부당하다고 여겨도 당과 등질 각오를 하고 재심을 청구하거나 고소·고발전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논란의 발단은 명씨였을지 몰라도, 여론조사 문제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왔던 문제였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먼저 여론조사에 대한 더욱 엄격한 견제, 감시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에서는 여론조사와 관련해 사전신고 의무를 면제해주는 대상을 대폭 줄이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입법을 통해 풀어야 하지만 관건은 정당과 언론이 개혁을 수용할지 여부에 달려 있다. 국회에서는 여론조사 사업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등 개혁안이 나오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여심위의 지위를 격상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20명 남짓한 위원회 조직으로는 혼탁해진 여론조사 문제를 바로잡기 어렵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여론조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학계에서는 ‘주술처럼 사용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론조사가 정치 과정에 포함된 것은 사실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는 참고자료라는 본래 기능으로 역할을 되돌려야 한다. 값싸고 빠른 게 언제나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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