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
디자인 전공 교수서 '팸테크' 기업가로
여성 입장서 브랜딩·패키징한 콘돔 등
능동적인 소비자 경험에 기여하고파
내향적이지만 새로운 일에 주저 않아
목표는 女 편견·고민 해소해줄 브랜드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성장합니다. 배우는 것이 분명히 있었어요. 작은 시도라도 조금씩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22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강단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즐기지 않는 내향적인 성격이지만, 도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박 대표도 세이브앤코 창업 당시엔 ‘내가 할 수 있을까, 해도 괜찮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괜한 우려는 아니었다. 박 대표는 여성을 위한 콘돔, 청결제 등을 만드는 기업을 준비 중이었다.여성의 성(性)이라는 금기에 도전하면서 마주했던 편견에도 박 대표가 사업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은 성에 대해 무지한 것이 미덕’이란 기존의 성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사명인 세이브도 ‘편견(BIAS)’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뒤집어 만들었다. 여성 성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뒤집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박 대표는 올해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 동아시아 어워드에서 1위 수상자로 선정됐다. 까르띠에 어워드는 영향력 있는 여성 창업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섹슈얼 아이템으로 수상자가 선정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대표의 열정과 용기는 앞서 창업했다 실패해 본 경험이 큰 자산이 됐다. 자신감을 얻은 박 대표는 올 하반기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 세이브는 오는 10월 제품 판매를 앞두고 있다.
-세이브앤코를 창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한국은 성에 대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 성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전형적인 한국 여자로 자랐다. 그러다 20대 때 미국을 가게 되고,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저보다 더 성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성숙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성이 성에 무지한 게 굉장한 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창피하다고 느꼈다. 내 몸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면서 바라보다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
-디자인을 전공한 교수였다가 제품을 만들게 됐는데,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인가.
△디자인을 수단으로 활용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보수적인 성 문화 그리고 부재한 성교육, 피임이라는 문제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그런 문화들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처음엔 디자인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못 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콘돔을 사기 위해 약국 편의점에 갔는데 그때 콘돔을 사는 경험 자체가 굉장히 불편하고 어려운 경험이었다. 대부분 남성을 겨냥한 상품들이 많았다. 까만 배경에 금박, 전사 그림, 말이 있다든지. 콘돔을 사러 갔지만 선뜻 집어서 계산하고 나오기가 어려웠다. 괜히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내가 콘돔을 사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브랜딩과 패키지가 콘돔을 사는 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구나 깨달았다. 그런 것이라면 내가 조금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존에도 여러 번 창업했었는데, 지금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나.
△처음 창업한 회사는 ‘데어즈’라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였다. 대학 졸업하고 바로 창업을 했었는데, 디자인 대행사 개념으로 고객 일을 받아서 진행했다. 두 번째로 기부 캠페인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기업 ‘이분의 일’을 만들었다. 2000원짜리 커피를 하나 산다면 커피를 반만 먹고 반을 나눈다는 개념에서 1000원치 커피만 마시고 1000원은 기부하는 방식이다. 렌딧을 운영하는 김성준 대표와 공동 창업을 했다. 국제 공모전에서 수상도 하고,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지속하지 못하고 사업을 끝내야 했다. 좋은 의도를 갖고 잘될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둘 다 경험이 많지 않았다. 사업 구조상 파급효과가 있으려면 더 많은 소비재 기업들과 협업을 해야 했는데 과정이 굉장히 쉽지 않았다. 비즈니스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 경험한 일과 만났던 사람들은 지금도 회사를 운영할 때 큰 도움이 된다.
박지원 세이브앤코(SAIB & Co) 대표가 서울 마포구 회사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원본보기 아이콘
-‘펨테크(Femtech·여성 헬스케어 사업)’ 기업은 투자 유치가 어렵다고 하는데, 요즘 상황은 어떤가. 까르띠에 수상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펨테크도 어렵지만, 여성 창업자는 두 배로 어렵고 소비재도 또 어렵다. 전체 스타트업에서 보면 비주류 분야다. 펨테크가 지금은 이렇게 관심을 받고 있지만 여성의 건강 자체가 헬스케어 시장에서도 굉장히 늦게 발전이 되고 비중이 작은 편이다. 스타트업 대부분이 IT, 기술 쪽에 많이 집중돼 있다 보니 소비재를 생산하고 브랜드를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투자받을 기회가 적다. 성에 관한 것 자체가 금기로 여겨지다 보니 투자를 주저하는 분들도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까르띠에 수상 이후 저희를 비난하는 사람들한테 저희가 방어할 수 있는 하나의 무엇인가가 생겼다. 큰 브랜드에서도 우리가 하는 일의 임팩트를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이나 가족관계에서 형성된 성향 등이 지금의 박지원에게 영향을 미쳤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계속 일을 하셨다. 어머니도 커리어를 멋지게 쌓아 오신 분이다. 부모님 모두 바쁘셨고 어릴 때부터 독립적으로 커서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굉장히 열심히 일하시는 것이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일로 생각됐고, 그것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여성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자랐고, 혼자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적었다.
-독립적인 성향은 선천적인가.
△제가 굉장히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성격을 보면 소심하고 외향적이지 않고 진짜 내향적이고 내성적이다. 처음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하고 속으로는 계속 긴장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일을 할 때는 새롭게 도전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고 하는 것에 주저함이 별로 없는 편이다. 저도 신기하다. 교수 생활할 때에도 새 학기를 시작할 때는 항상 긴장하고 떠는 스타일이었다. 사업을 하고, 대표 역할을 한다고 하면 뭔가 타고난 발표자일 것 같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아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빨리 잊어버리는 성격 같은데.
△제가 가진 큰 장점이 잘 잊어버리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진짜 잘 기억하는 스타일이지만, 스트레스를 막 받거나 너무 힘든 일이 있어도 그냥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다음 날에는 그런 생각을 잘 안 한다. 소위 말하는 ‘회복탄력성’이 제 강점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타격을 받으면 오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는 그냥 빨리 털고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스타일인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진짜 많이 힘들었다. 이유 없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름 평탄한 삶을 살았고, 교수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많이 해주지 않나. 그런데 섹슈얼 아이템을 판매하는 스타트업 대표가 되니까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 그 차이가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처음엔 성희롱 같은 악성 댓글이 너무 심했다. 페미니스트들은 ‘핑크 코인’이냐고 욕을 했다. 저희 사업의 취지에 공감해주시고 좋게 봐주는 여성분들이 저희를 대신해서 방어를 해줬다. 나쁜 댓글은 신고도 해주시고, 좋은 기업이라고 반박을 해주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매우 많은 위안을 얻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SAIB & Co) 대표가 서울 마포구 회사의 분홍색 인테리어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원본보기 아이콘
-세이브앤코의 목표는.
△세이브라는 브랜드도 고객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갈 것이고, 여성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고민과 편견을 해소해주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다. 임신과 출산에 이어 완경에 이르는 과정까지 변하는 신체에 따른 편견을 긍정적 이미지로 바꿔나가면서 시기별로 발생하는 고민을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
-도전을 앞둔 여성 동료,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도전할 때 주저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해보고 안 되면 말지 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실패해도 분명히 그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고 배우는 것이 정말 많아서다. 세이브를 운영하면서 그전에는 해보지 못한 고민과 일을 하면서 배웠고, 성장하고 있다. 그것이 정말 너무 좋다. 물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한국에서는 실패에 대한 걱정이 크지만 저는 실패해도 더 인정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배움이 분명 있다. 작은 시도라도 조금씩 해야 한다.
박지원 대표는,
디자이너이자 사회적 기업가, 교육자로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미 국무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이화여대에서 시각정보디자인을 공부했다. 30회 이상 국제 디자인 어워드 수상, 2015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포럼에서 젊은 문화 혁신가로 선정된 바 있다.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학교 디자인 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던 2018년 세이브를 만들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lboqhen.shop) 무단전재 배포금지>